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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7-01-22
 제목  에이커홈(Earland Akerholm, 한국명: 玉居欽, 1888~1920) 선교사
 주제어  [내한 선교사] [양화진 선교사] 구세군
 자료출처  양화진선교회  성경본문  
 내용

에이커홈(Earland Akerholm, 한국명: 玉居欽)은 1888년 3월 13일 스웨덴(Barkeryd)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14년 3월 9일 구세군 사관(正尉)으로 내한하여 처음에는 개성 지방관으로 봉직하였다.

1916년 6월 스웨덴에서 함께 내한한 구세군 선교사 뽁비스트(Natalta)와 ‘경성제일영내’에서 결혼하였다. 이 결혼식에는 동ㆍ서양 사관들이 많이 참석하여 결혼식이 더욱 성대하게 거행되었다.(구세신문, 1916.8.1 참조)

에이커홈 부부는 1918년 6월 개성에서 특별 부흥회(전도대회)도 개최하였다. 부흥회의 배경과 성과에 대하여 1918년 7월 1일자 구세신문은 다음과 같은 요지로 보도하였다.

“개성은 물건을 많이 팔자는 수단으로 중심 상가에서 매년 관등(觀燈) 행사를 한다. 1918년에는 전기회사가 새로 설립되어 전기등(電氣燈)과 촛불등화(古來燈火)를 겸비한 행사로 구경꾼들이 전에 비하여 배나 되었다. 개성지방관 에이커홈(Akerholm)과 그 부인, 경성 본영의 어륵손(Ericsson) 선교사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합심 협력하여 가로전도 여섯 차례, 영내 예배 일곱 차례를 통하여 1,430명이 복음을 접하고, 31명이 회개하였으며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토요일(18일)과 주일에도 여전히 계속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후 에이커홈 선교사는 1920년 충청북도 지방관으로 전임되어 선교사업을 계속하였다.

이때 그는 사재를 출연하여 조성한 기금으로 영동병원을 설립하여 농촌지역에 의료사업을 전개하였다. 충청북도 지방 활동 중 1920년 3월 15일 장티푸스로 인하여 32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였다. 장례식은 스웨덴 여성 사관 우을선(Verna Olsson)과 영국 사관 파우모(George Parlmer)에 의하여 영동에서 집례 되고 그의 유해는 영동 계산리(향교 건너편) 뒷산에 안장되었다. 이때 서울에서는 실베스터(Sylvester, 한국명: 薛寶德) 서기장관 주재로 추도회가 인도되었다.

스웨덴의 구세군 사관으로는 세 번째로 순직한 선교사였다.

2000년 구세군 대한본영은 이들 선교사의 숭고한 신앙과 역사적 사실을 후대에 전하려는 취지에서 ‘구세군순교성지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2000년 9월 27일 에이커홈의 유해를 충북 영동에서 서울의 양화진 제2묘역(나-25)으로 이장하였다.


영동에 건립되었다가 양화진으로 옮겨진 그의 묘비에는 “朝鮮忠淸北道 救世軍地方營 族官 玉居欽 主降生 一八八八年 三月 十三日生 一九二十年 三月 十五日 別世(조선 충청북도 구세군 지방영 옥거흠 주강생 1888년 3월 13일생 1920년 3월 15일 별세)라 쓰여 있다..

그리고 ”復生者 我生命者 亦我信者 雖死必生而 信我者 永不死爾信否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을 입게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힘입어 구원을 얻게 하셨으니 우리 대신 죽으시어 저와 함께 살게 하시니라)”라 기록되었다.


 



◇ 서울 여자 관장 에이커홈(Mrs. Akerholm) 부인

스웨덴 출신의 여성 사관으로 1914년 3월 9일 내한하였다. 에이커홈과 서울에서 1916년 6월 결혼하였다. 1920년 남편이 별세한 뒤에도 한국에 머물면서 구세군 선교사로서 활동을 계속했다. 1922년에는 전도를 위하여 성경과 찬송가를 자비로 사서 나누어 주었으며 1925년 7월 경성 제2영 담임사관으로 봉직하였다.

1925년 9월 19일 정위에서 부관(副官)으로 승진하여 함경도 고산 구역관(區域官)으로 임명되었다. 구역관 취임식에는 서기장관 등 많은 구세군 사관과 병사들이 참석하였다. 이때 4명의 새로운 회개인이 있었으며 병사대표(리종삼)는 환영사에서 “마음과 뜻을 더욱 다하여 구역관을 도와서 고산뿐 아니라 함경남ㆍ북도에 널리 구세군기가 날리도록 힘쓰겠다.”는 열렬한 환영사가 있었다.(구세신문, 1925.10.1 참조)

한편 1926년 구세군 분규 사건 때에는 한국 사관들이 제출한 진정서(20개항) 중 제17항에 “부관 옥거흠(Mrs. Akerholm) 부인은 애매히 조선인 사관을 무기(誣欺)하니 처리하여 줄 것”이라는 기피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28년 9월 27일 서울 정동에 구세군사관학교가 개관될 때는 여성사관의 교관이었다.

1930년 영국 만국사관대학 연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서울여자관장(1933), 서울혜천원(1938)에서 폭넓게 활동하면서 1934년 4월 참령으로 승진하였다. 이밖에 그는 구세군 본영 사관 부인들로 조직된 자선위문단 책임관, 원산 선교사휴양관장, 여성사업부, 사회사업부에서 봉직하였다. 1940년 12월 2일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출국되었다. 그 후 스웨덴에서 80세 고령으로 1965년 1월 10일 별세하였다.

 

>> 목차고리 : 신학 > 선교 > 선교사

>> 연결고리 : 내한 선교사, 양화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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