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으로서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중육(仲育)이다. 그리고 호는 금석(琴石)이며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서울 출생으로 아버지는 영의정 순목(淳穆;1816~1884)이다. 1869년경부터 박규수의 지도를 받으며, 김윤식·김옥균·박영효·서광범(徐光範)·유길준 등과 교유했다. 이때 위원의 〈해국도지 海國圖志〉, 서계여의 〈영환지략 瀛環志略〉 등 중국의 개화서와 박지원의 〈연암집〉 등을 읽으면서 개화사상을 형성해나갔다. 1876년 박규수가 죽은 뒤에는 중인 출신 의관인 유홍기의 가르침을 받았다.
1873년(고종 10) 문과에 급제 정자(正字) ·대교(待敎)를 지내고,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서 통리기무아문 부경리사가 되었다. 이듬해 부제학을 거쳐 참의통리 내무아문사무(內務衙門事務) ·참의군국사무 ·참의교섭통상사무를 역임, 1883년 협판(協辦)교섭통상사무를 지내고 전권부대신(全權副大臣)으로 미국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병조참판이 되었다.
개화당(開化黨)의 중진으로서 신설된 우정국(郵征局)의 총판(總辦)이 되어 그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사대당(事大黨)을 제거, 신정부를 조직하고 우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청(淸)나라의 개입으로 3일천하로 신정부가 무너지자 박영교(朴泳敎)와 함께 끝까지 임금을 호위하다가 청군에게 피살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원되고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편저에 《일본육군 총제(總制)》 《일본육군 조전(操典)》 등이 있다.
두산대백과사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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