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 저항지식인과 장사층 출신 인물로 난의 지휘부를 구성하다
홍경래의 난의 최고지휘부는 출신ㆍ사회계층이 서로 다른 다양한 인물들이 한데 어울렸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들은 주로 ‘저항지식인'과 ‘장사층(壯士層)' 출신의 인물로 구성되었다. 저항지식인은 기본적으로 지식을 바탕으로 지배체제 또는 사회모순에 대해 저항하였으며 계층이나 지식의 내용이 매우 다양하였다. 봉기의 준비와 총지휘를 담당한 홍경래와 우군칙 등이 전형적인 저항지식인들이었다. 한편 그 당시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사람들 중에 무력을 몸에 갖춘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장사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회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들도 주어진 사회 체제 안에서 출세하기를 포기하고 저항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는데 선봉장을 담당한 이제초ㆍ홍총각 등이 전형적인 장사층이다. 최고 지휘부 밑의 봉기군 장수들도 장사층 출신의 인물들이었다. 김창시와 김사용은 저항지식인이지만, 그 지역의 지배층 출신이었으므로 신분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이밖에 부유한 상인인 이희저라는 인물이 참여하였는데, 그는 친척들이 그 지역의 향리와 장교 및 큰 상인들이었으므로 반란의 내응자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참여자들도 다양하였다. 아래로는 임금노동자와 일반 농민으로부터, 위로는 대대로 정부의 특별대우를 받아오고 수령을 역임하기까지 한 철산정씨 가문의 중요 인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였다.
ㆍ 상층민을 흡수한 평민 출신 지도 세력
더욱 중요한 것은 신분이 평민일 뿐만 아니라 이렇다 할 재산마저 없던 홍경래가 그들을 총지휘하였다는 사실이다. 홍경래뿐 아니라 우군칙과 홍총각 등 낮은 신분의 인물들도 봉기의 핵심 지도자로서 참여자들을 지휘하였다. 평민 출신의 하급 지식인이 상층민들을 광범위하게 끌어들이고 지휘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조선 후기 평안도만의 특이한 지역사정 때문이었다. 평안도에는 조선의 전통적인 지배계층인 사족(士族) 계층이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유교적 지배체제가 강력하지 않았고, 따라서 다른 지역에 비해 상업 활동이 더 활발했고, 개인의 능력을 바탕으로 한 자유로운 경쟁이 상대적으로 훨씬 많았다. 결국 평민들이 더 활발하게 성장하였고, 지식과 무예실력을 바탕으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ㆍ 무력으로 국가 권력 탈취 기도
홍경래의 난은 조선 정부를 부정하면서 무력으로 국가의 권력을 탈취하고자 한 반란이다. 반란군의 최고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장악한 지방의 권력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정부의 요충지를 향하여 진격하였으며, 서울로 진격해 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또한 반란군이 세상을 바꿀 인물이라고 내세운 정진인(鄭眞人)을 향해서는 ‘주상전하' 즉 임금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으며, 진압군을 향하여 ‘너희 나라'라는 말을 쓰기도 하였다. 또한 반란군과 연락하고 지시를 받는 사람들이 서울에서 공작을 벌이다 체포되어 처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가 권력을 빼앗으려는 목적은 당시 국가 방어의 중심지였던 안주와 의주, 그리고 영변에서 막히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ㆍ 정진인설을 내세워 반란을 정당화
홍경래의 난의 지도자들은 유교의 초보적인 민본의식과 민간신앙이라 할 수 있는 정진인설을 바탕으로 반란을 정당화하고, 그것이 승리할 것이라고 선전하였다. 정치가 잘못되고 재난이 일어나서 백성들이 굶주리는 고통을 겪고 있으니 중앙 권력이 정당성을 잃었다는 내용은 유교적 민본의식을 내세운 것이었다. 하지만 반란을 준비하고 지휘하는 현장에서는 정진인이 와서 세상을 뒤엎게 된다고 선전하였다.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난 신령한 인물이 중국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자기 무리 10만을 거느리고 조선을 뒤엎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변방에 와 있는데 홍경래는 그의 뜻을 받들어 군사를 일으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을 구할 성인'을 정진인이라고 불렀는데, 때로는 정시수(鄭時守) 또는 정제민(鄭濟民)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때의 ‘진인'이란 세계와의 대결을 준비하고 있으며, 대결이 벌어진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으로 인정되는 인물을 뜻한다.
참여자들은 정진인이 구원자로 온다는 선전을 대개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반란에서 종교적 성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다음 세상이 어떨 것인가 하는 내세에 대한 설명이 없었고, 세상에 종말이 왔다는 암시를 하고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또 정진인설을 중심으로 신앙결사를 맺거나 종교 활동을 한 일이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반란이 일어난 후에도 종교적 의식의 수행은 물론 간단한 주문 암송 등의 흔적마저 전혀 없다. 홍경래를 비롯한 반란 지도자들에게서 종교 지도자로서의 직함도 나타나지 않고 개인적으로 종교적 상징을 내건 사례도 확인되지 않는다. 이것은 홍경래의 난이 외국의 종교반란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신비주의에 깊이 빠지지 않고 좀 더 현실적으로 움직였음을 보여준다.
ㆍ 비폭력 반란
홍경래의 난은 외국의 민중반란에 비교할 때 반란군이 지극히 비폭력적으로 행동하였다는 특징을 지닌다. 중국에서 일어난 민중반란, 특히 종교반란은 적대적인 정부측 인물뿐만 아니라 일반 농민들에 대해서도 매우 배타적이었고 닥치는 대로 죽이라는 명령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홍경래의 난은 짧은 시간에 청천강 이북 8개 군현을 장악하는 과정에서도 지방관은 단 한 사람만을 죽였다. 자신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하거나 끝내 죽이는 경우에도 후히 장사 지내곤 하였다. 통제받지 않은 약탈 행위 등은 나타나지 않았으며, 상인들의 소유권을 보장하고 주민들의 재산은 사들이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ㆍ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반란군 진압
반면 정부에서는 매우 폭력적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반란을 진압하였다. 반란의 경과를 살핀다면 그것은 국가 체제가 흔들릴 정도의 상황은 아니었다. 반란 초기에 봉기군이 8개 군현을 점령한 것이 괄목할 만한 사실이고, 그로 인하여 홍경래의 난은 조선시대의 민중반란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 지역 군사력의 거점이었던 의주ㆍ영변ㆍ안주의 수령들은 어떤 틈도 보이지 않고 방어에 성공하였다. 정부군은 반군을 사로잡거나 해산하기보다는 죽이는 것을 방침으로 삼았는데, 많은 민간인이 정주성 농성에 가담한 것은 진압군의 무자비한 살육과 방화와 약탈로 인한 것이었다.
홍경래의 난은 조선이 서구 세력의 영향을 받기 전, 전통 사회의 마지막 단계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조직화된 최고 지휘부가 통일된 계획 위에서 반란군을 동원하여 중앙 정부의 전복을 기도한 가장 큰 규모의 민중반란이었다. 또한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에 포함되었던 하층민의 반란 참여 양상을 이어받았던 것으로 판단되며, 후대의 변란에 하나의 전형을 제시하였다.
◆ 원고 작성 : 오수창 (한림대학교 사학과 교수)
◆ 교정 및 윤문 : 상명대학교 문화콘텐츠 창작소재연구소
순조11(1811)년에 평안도에서 터진 반란의 최고지휘자 홍경래에 대해서는, 많은 개설서들이 '경제적으로 몰락한 잔반'(이기백, 『한국사신론』), '몰락양반'(변태섭 『한국사통론』, 강만길 『고쳐 쓴 한국근대사』)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1992년에 우리 연구회에서 간행한 『한국 역사』에서 는 홍경래를 '토호 출신'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우군칙 김사용 김창시 등 홍경래 휘하의 인물들에 대해서도 그 신분을 대개 홍경래와 같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북한의 『조선전사』에서는 홍경래의 신분을 '평민'으로 보았다. 홍경래를 '잔반' '몰락양반'으로 보는 것은 그 개인이나 반란의 계층적 성격에 대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닐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의 민중의식의 성장과 저항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몰락양반'이 차지하는 비중을 강조하는 설명틀에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홍경래의 신분을 몰락양반·토호라고 볼 근거는 없다. 당시 정부에서는 봉 기 참여자의 신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신분별로 평가와 조처를 달리 하였다. 홍경래난에 대해서는 엄청난 분량의 자료가 남아있고 홍경래와 그의 친척들에 대한 기록도 많다. 하지만 그 기록들에서 확인되는 것은 양반이나 토호로서의 성격이라기보 다는 홍경래 일족과 다른 평민들 간의 공통점들이다. 평안도 사정에 밝은 문일평이 일찍이 『민중혁명의 선구 홍경래』(1939)에서는 그를 평민으로 보았는데, 근거가 밝혀져 있지 않아 아쉽기는 하지만 그것이 사실에 들어맞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왜 홍경래와 그의 동료들을 '몰락양반'이라고 보는 설명이 일반적이었을까? 지금까지 홍경래난에 대한 설명은 『홍경래』라고 하는 그의 전기를 기초로 한 경우가 많았다. 그 전기에서는 홍경래가 외숙인 유학권에게 글을 배웠으며, 19세 때는 평양에서 열린 사마시에 응시하였다고 하였다. 또 극심한 지역차별 때문에 문과에서 부당하게 탈락한 후 반란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런 내용들에 더해, 홍경래난까지도 중앙의 '당쟁'과 무리하게 연결시킨 일본인 학자 오다(小田省吾)의 서술이 그의 신분을 설명하는 기반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단적으로 말해 『홍경래』의 기록은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이우성·임형택 교수는 그 글을 『이조한문단편집』에 수록하면서 그것이 19세기 말에 쓰여진 '소설'이었다고 해설하였다. 그 전기가 홍경래난에 대한 수많은 기록들을 참고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19세기 후반 지식인이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상상력을 동원해 창작한 '소설'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예를 들어 19세기 초에 평안도민이 과거 급제, 그것도 그 지방의 사마시에서 큰 차별을 받았다고 서술한 것도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홍경래난의 주모자들의 계층을 '몰락양반'으로 보는 것은 그 난에 대한 다른 오해와 연결된다. 반란 당시에 나온 격문을 보면, 농민의 구원자인 정진인(鄭眞人)이 썩은 정부를 깨뜨리고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명나라의 후예'들을 거느린다고 되어있다. 이것을 근거로 '낡은 화이관의 틀을 벗어버리지 못했다'는 점이 홍경래난의 한계로 지적되곤 하였다. 하지만, 반란 현장의 사정은 정반대였다. 홍경래를 비롯한 지휘부에서 농민들을 구원하려 온다고 선전하던 부대는 결코 '명나라의 후예'들이 아니라, '오랑캐 군사' - 호병(胡兵)이었다. 격문의 구절은 반란 지휘부의 생각이 아니라, 그 격문을 작성한 개인의 생각일 따름이었다. 격문 작성자 김창시야말로 '몰락양반'이었지만, 그는 반란 지휘부에서 아주 예외적인 존재였고 저항의 길에서도 기회주의적인 행태를 보이다 개죽음을 당한 인물이었다.
홍경래난은 결코 몰락양반이나 잔반들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성장하는 평민들의 힘을 바탕으로 그들에 의해 일어난 반란이었다. |
오수창(한림대 사학과 교수, 중세사2분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