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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kcmseoul  작성일  2008-04-11
 자료구분  주제어  주제어  전도하는 요나
 내용

성경:요나3:1          두 번째 임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네 삶의 근거입니다. 그러므로 삶은 말씀에 대한 순종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삶이 아름답다라는 말은 곧 하나님의 임재의 반영인 거룩한 말씀이 삶속에 물씬 배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삶을 사정없이 망가뜨려 놓지만 주의 말씀은 삶을 아름답게 꾸며줍니다. 거룩함의 성결은 삶의 진가를 유감없이 드러내줍니다.

Ⅰ. 두 번째(A second time)
  '두 번째'라는 말에서 우리는 동일한 말씀 내용의 재차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온전히 이루기까지는 계속 유효함을 보여줍니다(이사야55:11). 요나의 불순종으로 아직 하나님의 뜻은 성취되어지지 않았기에 주님은 다시 요나에게 동일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즉각적인 순종으로 매듭을 짓지 못하였기에 한번 더 순종을 전제로 하여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느끼는 감정은 달랐습니다. 금석지감(今昔之感)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전에는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말씀을 대하였지만 지금은 아멘 하며 뛰어갈 태세입니다. 전에는 여윈잠에 졸린 듯 연신 하품하며 거드름 빼었지만 지금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소댕 보고 놀란다'라는 심정으로 바짝 긴장해져 머리끝이 쭈뼛쭈뼛합니다. 지금은 순종하려는 마음뿐입니다. 또한 '두 번째'라는 말에서 다시 한번 은혜의 주님을 만납니다. 불순종한 요나, 참으로 괘씸하기 그지없고 참으로 불쾌하기 그지없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순종할 기회를 주십니다. 요나 말고도 주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지만 주님은 다시 한번 해보자고 그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Ⅱ. 말씀이 임한 요나
  동일한 내용 가지고 찾아오신 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요나의 심정은 감격에 겨웠을 것입니다. 말씀의 임함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요나를 주의 역사를 이루는데 사용할 파트너(동역자)로 인정하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어떠한 요나에게 재차 말씀이 임했습니까? 철저히 회개함으로 성결해지고 겸손하여진 요나에게 말씀이 임했습니다. 이제는 오직 주님 위하여 살겠노라고 결심하고 헌신한 그에게 주님은 다시금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부어주십니다(야고보서4:6). 주님은 겸손한 자를 사용하십니다. 죄는 주님의 뜻을 거슬리는 거침돌이지만 겸손은 주의 역사를 이루는 디딤돌입니다. 주 하나님은 아무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시지 않습니다. 말씀을 담을 그릇이 준비된 자에게 은혜로 임하십니다. 엎어진 그릇에는 결코 한 방울의 물이라도 담을 수 없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시멘트같이 굳은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차돌맹이같은 강퍅한 심령이 부서져내린 요나에게 하나님은 말씀으로 재차 임하셨습니다. 말씀으로 다시금 사명에 살도록 세워주셨습니다. '두 번째'는 은혜의 기회를 말합니다. 여기에는 순종 외에 다른 여지가 없습니다. 요나도 이 사실을 잘 압니다. 두 번째 임한 주의 말씀이 자신의 삶에 가지는 의미를 그 누구보다 잘 압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 순종의 허리띠를 단단히 졸라매어야 합니다. 첫 번째 말씀에 순종하면 더욱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임한 말씀은 물러설 수 없는 절박한 기회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성경:요나3:2                 복음전도의 3요소

  전도는 그리스도인의 표지(標識)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복음전도가 결여된다면 그리스도인의 고유한 특성을 잃어버린 거나 다른 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위한 유일한 복음(福音)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는 자를 어찌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있으며, 삶 속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 자를 어찌 그리스도인이라 지칭할 수 있으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신앙을 가지고 정신없이 달려갈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가치가 드러납니다.

Ⅰ. 하나님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전도는 주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가라 하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전하라 하신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전도의 알맹이인 복음을 주신 이도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전도는 철두철미 주 하나님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전도인가? 바로 주 하나님을 위한, 주님의 영광을 위한 전도입니다.

Ⅱ. 복음-"내가 네게 명한 바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메시지가 바로 전도의 내용입니다.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습니다. 받은 말씀 그대로일 뿐입니다. 체험이 전도의 본질일 수가 없습니다. 체험은 단지 복음의 말씀이 삶으로 우러나온 것입니다. 무엇을 전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맙시다. 그저 주께서 주신 말씀을 순수하게 아멘 하면 됩니다. 복음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면 복음의 말씀이 권능으로 역사 합니다. 니느웨 성을 향하여 요나가 외친 것은 오직 그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뿐이었습니다. 요나는 결코 하나님을 앞지를 수가 없습니다.

Ⅲ. 선포
  전해야 합니다. 삶으로, 온몸으로 그리고 입으로 외쳐야 합니다. 전도는 정적인 머무름이 아닙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동적 활동입니다. '가라, 그리고 선포하라'. 성령님께서 전하는 자를 도우십니다. 믿음은 순종입니다. 주님 앞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명령을 기다립니다. 이미 명은 떨어졌습니다. '가라, 그리고 선포하라'. 이제 순종할 차례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을 가슴에 품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발이 부르트도록, 목이 쉬도록 외쳐야 합니다. 세상은 복음에 굶주리고 있습니다. 누군가 전해야 합니다.

   영적 추수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마지막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토록 간절히 사모하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오실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복음전도는 주님이 시작하셨습니다. 과정도 주님이 도우실 것이요, 열매도 주님이 맺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복음의 말씀 들고 그저 가서 전할뿐입니다. 순종은 기회입니다. 복음전도는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의 기회입니다.


성경:요나3:3∼4          여호와의 말씀대로

  순종은 주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우선 마음으로 하나님을 존경해야 외적인 순종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불순종은 내가 하나님보다 높다는 교만에서 나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만남으로 주 하나님을 가장 크게 보게 됩니다. 그리고 전적인 순종으로 위대하신 주님의 권위에 철저하게 굴복합니다.

Ⅰ.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요나
  진정 하나님을 크게 보는 자가 말씀을 귀하게 여깁니다. 순종의 첫 단계는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며, 그 다음 단계는 여호와의 말씀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전에는 요나가 주 하나님의 권위에 전적으로 굴복하지 않았기에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겨 발로 멀리 차 버렸습니다. 하지만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체험을 한 뒤에는 주님의 말씀을 공손히 받듭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귀담아 듣습니다. 얼마나 여호와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냐에 따라 순종의 순도가 결정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참으로 귀하게 여길 때 우리는 주어진 여러 가지 환경을 핑계의 장애물로 삼지 않습니다.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음성에 인생을 겁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존귀하게 받들고 있습니까?

Ⅱ.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요나
  본문 3, 4절은 요나의 순종을 보여줍니다. 무릎 꿇고 엎드려 여호와의 말씀을 공손히 받은 요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잔꾀 피우며 갈등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순종합니다. 먼 길 마다 않고 니느웨를 향하여 일어서 힘찬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그리고 성을 돌아다니며 힘껏 외칩니다. 그는 말씀에 붙잡혀 살았습니다. 이방인의 땅에서 홀로 우뚝 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가장 크게 보고 또한 그 무엇보다 말씀을 가장 귀하게 여겼기에 둘러 싼 이방인들의 시선에 주눅들지 않았고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조금도 망설임 없이 담대히 말씀을 외쳤습니다. 말씀에 붙들려 사는 요나의 모습, 참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에는 행함이 따릅니다(야고보서2:26).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순종을 전제로 합니다. 순종은 우리가 얼마나 말씀을 크게 보느냐에 있습니다. 말씀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고 받아 드리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크게 순종합니다. 온전한 순종은 온전히 주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과 주의 말씀을 공손히 받드는 손에서 나옵니다. 순종은 힘들지만 아름답습니다.


성경:요나3:4-5                복음의 능력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습니다(히브리서4:12). 살아있는 능력의 말씀이기에 역사(Work)가 나타납니다. 주의 말씀이 귓전을 울릴 때 심령도 사정없이 울립니다. 말씀을 들을 때 강력한 부딪침이 일어납니다. 마음을 찢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영혼 깊숙이 파고드는 예리한 말씀에 변화를 위한 몸부림이 터집니다.

Ⅰ. 하룻길(4절)
  하루에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거리는 얼마나 될까요? 성을 둘러보는데 삼일이 걸리는 니느웨 성을 요나가 하루를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는데 놀라운 역사가 따랐습니다. 첫날에 강퍅한 니느웨 백성들이 거꾸러졌습니다. 성의 종말을 의미하는 심판의 메시지에 지체없이 백성들의 마음이 녹아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심판의 저울대에 악독을 쌓아올리며 그것이 기울어지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흘러갔습니다.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 앞에서 니느웨 백성들은 죄악을 즐기며 방자하게 수많은 밤을 지새웠습니다. 하지만 주님 앞으로 손을 들고 나오는 데는 하루면 족했습니다. 말씀의 권능이 너무도 큽니다. 아무리 죄악의 담이 높고, 아무리 죄악의 골짜기가 깊다 할지라도 주의 말씀이 이르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평지로 메꾸워집니다. '하룻길', 바로 말씀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Ⅱ. 굵은 베(5절)
  낯선 외국인의 방문을 받은 니느웨 성은 급격하게 술렁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으레 관광 목적이겠지 했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정말 불쾌하기 그지없고 건방지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하나 이 낯선 외국인을 제지하거나 손찌검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음을 찢으며 통회자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준엄한 심판의 메시지를 듣는 순간 자신의 죄악에 소스라쳐 놀라며 주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육체의 쾌락을 좇아 즐겨 입던 평상시의 옷을 벗어 놓고 진정 회개하는 자의 낮아짐을 의미하는 굵은 베옷을 모두가 입었습니다. 외적인 회개의 증표가 성읍 모든 이에게 나타났습니다. 온통 성읍은 회개의 물결로 넘칩니다. 자기 본위의 일상적인 삶은 사라지고 오직 주님 앞에 서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복음이 이르는 곳에는 놀라운 회개가 화산처럼 폭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악을 폭로하고, 심령을 사정없이 뒤흔들어 놓으며, 철처한 회개의 몸부림을 치게 만듭니다. 하룻길의 말씀선포로 한 성읍이 뒤집어 졌습니다. 하룻길의 복음전도로 한순간에 도시가 거룩한 회개로 휩싸여지고, 단 하룻만의 말씀으로 한 민족이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뒹굴며 통회한 역사가 일어나다니! 참으로 복음의 능력은 엄청납니다. 우리는 능력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말씀의 권능을 믿습니다.


성경:요나3:7-8               가축의 금식

   니느웨 성의 회개 가운데 특이성은 가축까지도 회개의 역사에 동참하였다는 점입니다. 물론 자발적인 참여가 아닌 왕의 명에 따른 일이지만 참 특이합니다. 죄는 주인인 사람이 저질렀고 그것에 대한 부담은 애꿎은 가축에까지 지워졌습니다.

Ⅰ. 가축의 금식과 굵은 베
   어느 날부터 여물통이 텅 비기 시작하였습니다. 혀가 바짝 타 들어가도 물 한 모금을 마실 수 없습니다. 으레 동녘이 환하게 밝아 오면 쟁기질을 하러 들로 나가야 하는데 아무런 조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대신 어울리지도 않는 헝겊(베옷)을 주인이 억지로 입혀줍니다. 허기져 울어도 주인은 꿈쩍을 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갑자기 모든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니느웨 왕이 내린 조서는 단 하루만의 금식은 아닐 것입니다. 견디기 힘든 고통을 영문도 모른 채 덩달아 겪어야 하는 가축들의 모습이 측은하게 여겨집니다.

Ⅱ. 가축의 금식이 주는 교훈
   애꿎은 가축까지 끌어들이는 니느웨 왕의 지나친 열성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우리는 보아야 할까요? 아니면 니느웨 성의 죄악은 분명히 가축을 제외시킬 수 없는 공범(共犯)의 성격을 띠기에 당연한 일로 여겨야 할까요? 본래 사람의 범죄로 모든 만물이 죄의 영향아래 떨어진 것이지 결코 짐승이 범죄 함으로 사람이 그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죄는 인격적인 행위에서 나옵니다. 지(知)정(情)의(意)의 인격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것입니다. 그럼 니느웨 성 가축의 금식에서 얻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사람은 물론이고 가축까지도 금식에 끌어들인 것은 오직 한가지 일에만 전념한다는 결연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목전에 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오직 회개만이 있을 뿐이기에 모든 일상의 일들을 접어둡니다. 니느웨 백성의 전 삶을 하나님 중심으로 모아 놓습니다. 철저히 통회 자복하는 모습이 어떤 가축이든 지간에 풀 한 포기, 물 한 모금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 니느웨 백성에게 선명하게 배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도 진지했고 사태의 절박함에 너무도 간절했습니다. 말 못하는 짐승에게까지 강제로 금식을 시키고 굵은 베옷을 입히는 행위에서 우리는 피눈물나는 회개의 몸부림을 읽습니다. 회개, 오로지 그것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마치 니느웨의 일상사는 회개라는 한 화면에서 정지된 느낌입니다.

   회개는 적당한 선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대충 얼버무리다간 큰 코 다칩니다.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송두리째 드러내야 합니다. 진정 마음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철저함으로 회개의 그릇을 채워야 합니다. 회개하는 동안에는 하나님 앞에 오로지 통회 자복하는 자기 자신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다른 어떤 불순물을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의 모든 일도 멈추고 그리고 흐르던 시간도 멈춥니다. 회개는 기회입니다. 회개할 기회를 얻은 것은 전적 주님의 은혜이기에 진정 마음을 쏟아 회개에 집중하지 않으면 땅을 치며 크게 후회할 날이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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